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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잔상

문득 외할머니.

시골 외갓댁 놀러 가면 순한 장남이라고 형만 두 팔 벌려 반기시며 나는 그냥 슬쩍 쳐다만 보시던 외할머니.

까탈스런 외손자가 내 딸 괴롭힘에 화가 나셔서 은근 슬쩍 날 미워하심이 어린 내 눈에도 보였지만 시골 나들이에 들뜬 난 외할머니는 관심에도 없었다.

들판에 구경 갔다가 이쁘게 열리기 시작한 조그만 수박이 신기해 똑 따가지고 와서 엄마 여기 새끼 수박 있어~의기양양하게 자랑했건만 외할머니는 불같이 화를 내셨고 이유를 모른 어린 나는 외할머니 눈치를 보며 엄마 품을 파고 들었었다.

좀 성장한 후에 나는 엄마와 용돈 올려달라 안 된다 실랑이를 며칠째 하고 있는 와중에 하필 이때 외할머니께서 서울에 다니러 오셨다.

용돈투쟁으로 칭얼거리는 나와 용돈을 함부로 쓰고 넌 도대체 뭐가 될래 소리지르시는 어머니 사이에서 할머니는 내딸이 힘들어 하는 모습에 눈물을 흘리시며 나를 노려 보셨었다. 나는 그저 날 미워하시는 외할머니가 미웠을 뿐. 엄마 할머니 언제 가셔?

엄마는 곰과, 나는 여우과.
이 두 성격이 서로에게 피로감을 선사하며 툭하면 부딪혔고 엄마는 그때마다 내가 널 왜 나았나 몰라 요 말만 반복하셨었다.

그러나 세월은 영화처럼 반전이 있다. 커가며 나는 어머니와 회장과 비서 같은 일급 콤비가 되었고 형은 어린시절 언제 순했냐 싶게 어머니와 색다른 전쟁을 시작했다.

넌 누굴 닮아 이렇게 까탈스럽냐던 넋두리가 이젠 형으로 옮겨가 쟤는 누굴 닮아 저리 말을 안 듣나 몰라로 바뀐지 오래 되었다.

외할머니가 살아 계셨다면 말씀 드리고 싶다. 할머니, 세상엔 희한한 반전이 있어요. 할머니가 그렇게 미워하신 맨날 용돈 가지고 할머니 장녀와 전쟁을 치루던 제가 이젠 집사처럼 비서처럼 엄마의 손발이 되어 열심히 잘 지낼 줄 아무도 몰랐답니다.

통장 불어나는 재미밖에 모르시는 어머니에게 여행의 즐거움도 알려드리고 백화점 좋은 옷에 맛도 들이게 하고 세련된 할머니로 사시는 방법도 전수하고 집안의 크고 작은 위기를 넘기는데도 이 막내아들이 어머니 옆에서 비서처럼 서 있었다는 사실, 외할머니는 상상도 못 하셨죠?

남의 집 어린 수박을 똑 따서 망친 그 작은 어린아이, 용돈을 가지고 허구한날 싸우던 세상물정 모르던 아이가 철이 들어감을 우리 외할머니는 왜 모르셨을까요?

근데 생각해보면 저도 아직 갈 길이 먼가 봐요.왜냐면 전 지금도 절 미워하시던 외할머니가 미워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