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한수와 나한스

나한스의 시 한 수 '라면 물 올려 놓고서'



해가 진 집안은 적막하다.
이제 더 이상 엄마의 도마소리,
압력솥 칙칙칙 소리는 나지 않는다.

부엌에서 나던 설레이는 소리는
이제 환청이 되어 버렸다.
눈감으면 더 잘 들린다.

잡념엔 소박한 딴생각이 특효약이다.
뭘 끓일까? 짜장라면? 그냥 라면?
갑자기 엄마가 끓여주던 라면이 그립다.

조용히 얇은 냄비 하나를 꺼내어
물 550ml를 재어 담는다.
그냥 눈대중이다.

전구가 오래된 천장조명 아래에서
라면봉다리 작은 글씨가 야속하다.
보이니 안 보이니 나를 비웃는 글씨들.

계란을 넣을까?
냉장고엔 뭐가 있을까?
한기만 오싹한 냉장고는 오늘따라 냉랭하다.

흔한 파와 계란을 떨군 라면을 마주한다.
식탁 위에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라면 하나 먹는데도 추억을 강요당한다.

김치 하나 깔린 단출한 식탁 위에서
급하게 라면 들이키는 열기와 소음으로
엄마의 도마소리, 엄마의 향기가 겨우 겨우 숨겨진다.